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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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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베트남어: Chiến tranh Việt Nam찌엔짠비엣남영어: Vietnam War, 프랑스어: Guerre du Vietnam) 또는 월남 전쟁(한국 한자: 越南 戰爭), 월남전(한국 한자: 越南戰)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이후 분단되었던 베트남에서 1955년 11월 1일[52]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분단된 남북 베트남 사이의 내전임과 동시에 냉전 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고,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는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베트남 전쟁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남어: Mặt Trận Dân Tộc Giải Phóng Miền Nam)의 게릴라전과 북베트남 정규군인 베트남인민군의 정규전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1964년 8월에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개입함으로써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1965년에 미국대한민국오스트레일리아 등이 지상군을 파병하였다. 이후 8년간의 전쟁 끝에 1973년 1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그 해 3월 말까지 미군이 전부 철수하였고, 1975년 4월 30일에 사이공 함락으로 북베트남이 무력 통일을 이뤄 1976년에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 전쟁은 제공권을 장악한 압도적 군사력의 미군이 폭격과 공습포격, 수색 섬멸 작전 과정에서 네이팜탄과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투하하고 고엽제 등 화학 무기를 사용하여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희생시킴으로써, 미국 내에서 반전 운동을 촉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제적 군사개입에 대한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전쟁에서 300만명에서 500만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명칭[편집]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이 전쟁을 베트남 전쟁(베트남어: Chiến tranh Việt Nam) 또는 대미항전(對美抗戰, 베트남어: Kháng chiến chống Mỹ 캉 찌엔 쫑 미[*])이라고 부른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베트남 전쟁(영어: Vietnam war)으로 칭하지만, 프랑스와 베트남이 치른 전쟁이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에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영어: second Indochina war)[53][54]이라 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선 흔히 월남전(越南戰)으로 부른다.

전쟁 개입국[편집]

북베트남 지원 국가[편집]

중화인민공화국[편집]

1950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은 베트민이 수립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고 루오 귀보가 이끄는 군사고문단과 함께 무기를 지원하였다. 당시 베트민은 프랑스를 상대로 한 독립 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지원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집중되었다.

1954년 베트민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프랑스의 총리 피에르 멩데 프랑스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 저우언라이가 협상을 하여 제네바 협정의 주요 내용을 합의하였다. 당시 저우언라이는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여 베트민에게 북위 17도를 기점으로 하는 남북 분단을 수용하도록 하였다.[209] 중화인민공화국은 1960년 북베트남이 징병제를 실시하자 그에 필요한 쌀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62년 여름, 마오쩌둥은 북베트남에 9만정의 총을 무상으로 공급하도록 하였다. 또한 중국은 1965년부터 미국의 공습에 대항하기 위한 방공 화기와 도로 및 철도를 복구하기 위한 공병 대대를 파견하였다.

1968년 8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중소관계에 갈등이 발생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은 북베트남에게 소련과의 관계를 끊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북베트남은 이를 거절하였다.[210] 이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고 군자 지원단을 철수하였다. 1969년 우수리강의 전바오섬에 대한 중소 양국의 국경 분쟁이 발생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은 북베트남을 견제할 목적으로 크메르 루즈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 중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다.

크메르 루즈는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베트남 국경을 침범하여 무력 충돌을 야기하였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즈를 붕괴시켰고, 이 때문에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생하였다.[211]

소련[편집]

베트남 전쟁 후반기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비에트 연방은 남중국해에 배치한 함정을 통해 미국 공군의 B-52 폭격기 항로를 추적하고 이를 북베트남에 통지하였다. 북베트남은 이러한 경고를 활용하여 해당 지역에 폭격 경보를 내렸고,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212]

소련은 북베트남에 의료, 무기, 탱크, 공장, 핼리콥터, 곡사화기, 지대공 미사일을 비롯한 다양한 군사 무기를 지원하였다. 1991년 기밀 해재된 러시아의 자료에서는 소련이 베트남 전쟁동안 3천여명의 지원단을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1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편집]

1966년 8월 조선노동당의 결의에 따라 1967년 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하노이 방어를 위해 제921 전대와 제923 전대를 파견하였다. 200여명의 조종사로 구성된 이들 전대는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주둔하였다.[214]

이 외에도 최소 두 개의 방공포 부대가 추가적으로 파견되었고, 무기와 탄약, 그리고 2백만 벌의 군복이 지원되었다.[215] 김일성은 파견되는 조종사들에게 “우리 하늘인 것처럼 싸우라”고 연설하였다.[216]

남베트남 지원 국가[편집]

대한민국[편집]

<nowiki />” src=”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c/Crystal_Clear_app_xmag.svg/16px-Crystal_Clear_app_xmag.svg.png” width=”16″ height=”16″ srcset=”//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c/Crystal_Clear_app_xmag.svg/24px-Crystal_Clear_app_xmag.svg.png 1.5x, //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c/Crystal_Clear_app_xmag.svg/32px-Crystal_Clear_app_xmag.svg.png 2x”> 이 부분의 본문은 <a href=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입니다.

<nowiki />” src=”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c/Crystal_Clear_app_xmag.svg/16px-Crystal_Clear_app_xmag.svg.png” width=”16″ height=”16″ srcset=”//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c/Crystal_Clear_app_xmag.svg/24px-Crystal_Clear_app_xmag.svg.png 1.5x, //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c/Crystal_Clear_app_xmag.svg/32px-Crystal_Clear_app_xmag.svg.png 2x”><a href=주월한국군사령부, 비둘기 부대청룡 부대맹호 부대 및 백마 부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한국 전쟁 직후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을 고려하였으나 프랑스의 반대와 주변 국가 여론이 좋지 않자 포기한 바 있다.[217]

베트남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를 내걸고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였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미국의 요청이 있기 전인 1961년 박정희가 존 F. 케네디에게 먼저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케네디의 정책은 베트남 전쟁에 미군을 직접 투입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제안을 거절하였다.[218]

케네디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은 1964년 대한민국에게 의료 부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1964년 5월 9일 미국이 보낸 서한에는 “1개 이동 외과병원”을 파병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방부는 130명 규모의 이동 외과 병원과 10명으로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등 140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219] 통킹만 사건이후 미국은 대한민국에 후방 지원 부대의 파병을 요청하였고, 대한민국은 제6사단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인 비둘기부대를 창설하고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통해 파병하였다. 비둘기 부대는 3월 16일 사이공에 도착하였고, 사이공 동북쪽 22km에 있는 지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220]

1965년 미국은 베트남 주둔 민군의 사상자가 속출하자 곤경에 빠져있었다. 1965년 3월 11일 김현철 주미대사는 조지 볼 미국무부 차관과의 면담을 통해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추가적인 병력을 기꺼이 파견하겠다.”고 말했으며, 이동원 외부무 장관은 브라운 주한미국 대사와의 다음과 같이 협상을 했다.

  1. 파병 상한선은 5만명이내
  2. 한국군의 현대화 지원
  3. 북한의 침공시 미국이 즉각 출병하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한다.
  4. 남베트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 등 한국의 남베트남 시장진출을 보장한다.

위와 같은 한국 정부의 요구사항은 1965년 5월 17일에서 18일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대부분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6월 14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전투병력 정식 파병요청서를 접수하고, 8월 13일에 국회 의결을 얻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수도사단장 채명신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청룡 부대가 1965년 10월 9일 깜라인에 상륙하였고, 9월 20일부터 주월한국사령부가 사이공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11월 1일에는 맹호 부대가 꾸이년에 상륙을 하였다.[221]

대한민국의 베트남 파병 병력의 누계는 32만명에 달했다.[222] 베트남파병 병사의 의무 기간은 1년이었고, 파병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8년 당시의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수는 50,000여 명이었다. 파리 평화 협정으로 미군이 철수하면서 대한민국 역시 철군하였다.[223]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의 전사자는 약 5,000여 명이었고 11,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군은 전쟁 중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 약 41,000여 명을 사살하였다고 밝히고 있다.[222] 미국은 한국군 병사에게 2억 3,600만 달러를 지불하였고[222], 대한민국은 파병의 대가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대한민국의 GNP는 파병을 전후로 하여 5배 가량 성장하였다.[222]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편집]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오스트레일리아 병사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태평양 안전 보장 조약과 동아시아 조약 기구의 가입국이자 미국의 가까운 동맹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과 말레이시아 위기 때부터 인도차이나 반도의 정글에서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도미노 이론에 따른 공산주의 확장이 실재로 일어날 경우 자국의 안전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962년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보냈고 1965년부터는 전투 부대를 파병하였다.[224] 뉴질랜드는 공병과 포병 기술자부터 파병하기 시작하여 정규 보병을 파병하였다.[225] 오스트레일리아의 베트남 주둔 병력은 가장 많을 때를 기준으로 7,672명이었고 뉴질랜드는 552명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경우 베트남 참전 병사의 총 누계는 60,000명 이상이었고, 그 가운데 521명이 사망하고 3,000명 이상이 부상당하였다.[226] 뉴질랜드의 병력 누계는 3,000여 명이었고 사망 37명, 부상 187명이었다.[227]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뉴질랜드군은 제1 오스트레일리아 기동대를 편성하여 지금은 대부분 바리어붕따우 성에 편입된 옛 프억뚜이 성(Phước Tuy)에 배치되었다.[224]

필리핀[편집]

필리핀에서는 10,450 명이 의료와 기타 민간 평화 지원을 위해 남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필리핀 베트남 민간 행동 그룹(Philippine Civic Action Group-Vietnam, PHLCAG-V)에 속해 활동하였다.

태국[편집]

태국은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전투 부대를 파견하였다. 태국군 합법적인 파병 이외에도 미국 중앙정보부의 경찰항공정찰대에 비합법적으로 “자원”하여 라오스 영토내의 호찌민 통로를 공격하였다.

중화민국[편집]

1967년 11월부터 타이완의 중화민국은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전쟁 물자를 수송하는 비밀 작전을 시작하였다. 중화민국 정부는 운전병을 지원하였는데, 이들은 개구리 대원(Lien Doi Nguoi Nhai)이라고 불렸다.[2] 중화민국이 지원한 운전병의 수는 수백명 정도였다.[2] 북베트남에 침투된 중화민국의 특전 부대가 북베트남군에 의해 세 번 체포되기도 하였다.[2]

캐나다와 국제조정위원회[편집]

캐나다인도폴란드는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정전 감시를 위해 국제 조정 위원회를 조직하였다.[66] 공식적으로 캐나다는 베트남 전쟁의 어느 쪽에도 개입하지 않은 비교전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빅터 레번트는 그의 저서 《침묵의 공조:캐나다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서 이와 같은 공식주장과는 달리 캐나다가 남베트남측을 지원하였다고 주장한다.[228][229] 《캐나다 백과사전》은 캐나다가 공식적으로는 정전 감시활동을 하면서 비공식적으로 미국 중앙정보국을 지원하였다고 밝히고 있다.[230]

전쟁 범죄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는 베트남 전쟁에서 수색 섬멸 작전을 기반으로한 소모전을 기본 전략으로 세웠다. 이를 위해 농촌 지역의 주민들은 전략촌으로 소개되었고, 전략촌 이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전투원으로 간주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조사나 재판 없이 혐의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사살되었다. 미국 중앙정보부는 피닉스 전략을 통해 1968년부터 1971년 중반까지 27,000 여명을 체포하여 20,000 여명을 처형하였다. 바던 오즈번은 다낭 시민의 2%를 베트콩 용의자로 색출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를 고발하였다. 1971년 열린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오즈번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249]

  • 리드 : 공산주의자로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구금한 후 심문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 오즈번: 심문과정에서 살아남은 구금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 리드: 심의나 재판 절차 없이 전원이 죽었단 말인가요?
  • 오즈번: 베트콩에 협조했다는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전원이 처형되었습니다.

이 청문회에서 미국 중앙정보부의 작전 책임자 콜린은 “나는 누구 한 사람도 억울하게 처형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피닉스 전략의 목적이나 효과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콜린은 2년 후 미국 중앙정보부의 총책임자가 되었다.[249] 당시 사이공 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피닉스 작전이 시작된 1968녀 8월부터 1971년 중순에 으리기까지 그 진행과정에서 베트콩과 혐의가 있는 민간인 40,994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들 희생자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전 CORDS(Civil Operations and Rural Development(sic) Support Program, 민간활동 및 농촌개발 지원계획) 책임자이며 그 후 CIA 국장을 역임했던 대학 교수인 윌리엄 E. 콜비(William E. Coby)는 의회의 한 위원회에서 “자신은 베트콩 하부조직에 대한 우리측 정보의 정확서에 대해 한번도 만족해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피닉스 작전 과정에서 레이드 의원이 그에게 제시한 1,000명이라는 수치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베트콩 하부조직으로 ‘잘못 확인되었을 것’이라고 시인했다.[250] 따라서 이 작전으로 인해 20,000명 내지는 40,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기간동안 미군과 한국군은 민간인 학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미라이 학살하미 마을 학살 사건퐁니·퐁넛 양민 학살 사건빈호아 학살 등이 알려져 있으며 이 외에도 작전지역 내에서 수많은 학살이 있었다.

미라이 학살[편집]

<nowiki />” src=”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c/Crystal_Clear_app_xmag.svg/16px-Crystal_Clear_app_xmag.svg.png” width=”16″ height=”16″ srcset=”//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c/Crystal_Clear_app_xmag.svg/24px-Crystal_Clear_app_xmag.svg.png 1.5x, //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c/Crystal_Clear_app_xmag.svg/32px-Crystal_Clear_app_xmag.svg.png 2x”> 이 부분의 본문은 <a href=미라이 학살입니다.

미라이 학살은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이다. 347명에서 504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더욱이 몇몇 희생자는 성폭행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시체 중 일부는 절단된 채로 발견되었다.[251] 이 사건에는 미군 26명이 가담하였으나 입대한 지 4개월 2주밖에 되지 않은 윌리엄 켈리 소위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퐁니·퐁넛 학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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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퐁넛 양민 학살 사건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 디엔반 현 퐁니, 퐁넛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학살당하여 70여 명이 죽은 전쟁범죄다.[252] 이 사건은 2000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진상조사를 벌이면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되었다.[253]

퐁니·퐁넛 학살 사건은 전략촌 지역에서 일어난 양민 학살이었기 때문에 베트남 내에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고, 미군 역시 진상 조사와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지만 한국군 측은 학살이 없었다고 부인하였다. 또한 이에 대하여 나중에도 문제가 수 번 더 대두되기도 하였다.[254]

후에 학살[편집]

후에 전투 도중 남베트남 해방전선측에 의해 자행된 학살 사건으로서 확인된 민간인 희생자 수만 4,062명에 달하는 베트남전 중의 전쟁 범죄 중 가장 규모가 큰 학살 사건이다.

흔히 자유진영의 전쟁 범죄만 주목받곤 하나, 후에 학살 등 월맹측에서 일으킨 전쟁범죄들 역시 다수 있었으며, 전쟁 기간동안 월맹측에서는 이를 자유진영측의 전쟁범죄라 규정하는 프로파간다를 해왔다. 전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는 이것들을 부정하거나 침묵으로 대응했으며, 학살 등 전쟁범죄들에 대한 참전국들의 공동조사 요청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이유로 꼽힌다.

그러나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미국의 일부 진보적인 학자에 의해 반론이 제시되기도 했다. 후에 전투 당시의 상황과 미국과 사이공 정부측에서 제시한 문서들이 과장되고 각색되었으며, 또한 미국과 사이공 정부측의 근거로 제시한 2,748명의 명단이 처형한 사람의 명단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명단에서 즉시 처형되야할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후에 시의 비밀경찰 간부들뿐이었으며, 그 밖의 명단은 정확히 말하자면 ‘재교육’시켜야 할 명단이었고, 이후에 등장한 3,000명 4,000명 많게는 6,000명이라는 수치가 지극히 부풀려 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보와 맥락의 편향성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후에 전투 종결 이후 남베트남의 보복 학살과 전투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도시 80%가 파괴한 점에 대해선 언급되지 않으며, 폭격으로 사망한 이들에 대해선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문을 제시하기도 했다.

 베트남 공화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대한민국
 중화민국[1][2][3]
 라오스 왕국
 캄보디아
 크메르 공화국 (1970-)
 태국
 필리핀[3]
 베트남 민주공화국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크메르 루주
 파테트 라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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